[TF포토기획] 일본日本 경제経済보복報復광복光復 74주년周年, 친일親日 잔재残滓는 '여전如前'

입력入力: 2019.08.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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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日本語 번역자翻譯者감상感想

기자記者일본日本 통치統治시대時代한국韓國에 초래된 제도制度단어単語을 없애려고 제창提唱하고 있다.
를 들면 “유치원幼稚園”을 “유아원幼児園”에 바꾼다든가 가게의 이름으로 일반적一般的으로 사용使用되는 “∼”을 바꾸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 자체自體 상당相当단어単語일본어日本語로부터 와 있고 도대체 “대통령大統領”이라고 하는 단어単語일본어日本語다. “유치원幼稚園”을 바꾸면 “대통령大統領”도 바꾸지 않으면 안되어진다.
아마 한국인韓國人이기 때문에 70%라고 말해지는 일본어日本語 유래由来의 말을 전부全部는 바꾸지 않고 어중간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글 중 루비가 붙은 어구語句대부분大部分일본어유래日本語由来다. 도대체都大體문장文章의 타이틀 자체自體대부분大部分 일본어日本語다.)


서울역사駅舎 등의 건물建物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価値가 크므로 좋지만, 머릿돌은 총독総督휘호揮毫가 새겨지고 있으므로 제거除去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건물建物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価値가 큰 것이라면 “총독総督휘호揮毫”도 역사적歴史的 가치価値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韓國人사고思考비논리적非論理的이다.

지폐紙幣 초상화肖像画를 그린 인물人物친일親日화가画家다라고 할 이유理由지폐紙幣 초상화肖像画가 변한다고 한다. 화가画家일본日本의 그림을 배우고 한국韓國미술美術 발전発展공헌貢献인물人物이다.
김활란金活蘭씨는 일본日本학교學校제도制度를 배우고 이화여자대학梨花女子大學창설創設하고 한국韓國학문學問이나 문화文化발전発展최선最善을 다했다. 지금 그녀는, 친일파親日派다고 해서, 비난非難되고 있다. 한국인韓國人사고思考비논리적非論理的이다.

당시当時 문화文化가 늦고 있었던 자국自國발전発展 위해서는 진행進行일본日本문화文化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必須的이었을 것이다. 지금 친일파親日派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비난非難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韓國저명著名작가作家조정래趙廷来씨는 “일본日本 유학留學 다녀오면 무조건無条件 친일파親日派, 민족民族 반역자反逆者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Korean news)

굴욕屈辱역사歴史삭제削除하고 싶은 기분氣分은 알지만 모두 다 일본日本관계関係되는 것은 지워 없애자라고 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논리論理보다도 감정感情우선優先”이라고 하는 한국인韓國人이지만, 냉정冷静히 생각해야 한다.

현재現在의 어른의 한국인은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의 그림책을 읽고 일본인이 번역翻譯구미欧美문학작품文學作品의 한국어을 읽고 일본의 교과서教科書를 어레인지한 교과서教科書학습學習하고 자라 왔다. 일본의 기술技術을 받아들이거나 훔치거나 해서 현재現在발전発展한 한국을 만들어 내 왔다. (한국의 가짜와 표절)
정말로 절처徹底하게 일본적인 것을 배제排除하면 한국에는 대부분大部分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닐 것인가?

명절 때마다 즐기던 화투는 우리나라의 전통 놀이가 아니다. <ruby>일본<rt>日本</rt></ruby>의 하나후다에서 시작했으며 <ruby>일제<rt>日帝</rt></ruby><ruby>강점기<rt>強占期</rt></ruby>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화투패는 총 48장으로 열두 달마다 4장씩 짝이 있고, 각각에는 <ruby>일본<rt>日本</rt></ruby>을 <ruby>상징<rt>象徴</rt></ruby>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ruby>일본<rt>日本</rt></ruby> 화투는 뒷면이 검은색이며 <ruby>한국<rt>韓國</rt></ruby>으로 넘어오면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ruby>사진<rt>写真</rt></ruby>은 우리나라 <ruby>기본<rt>基本</rt></ruby> 화투패를 모아 다중노출로 촬영했다. /이선화·이덕인 <ruby>기자<rt>記者</rt></ruby>
명절 때마다 즐기던 화투는 우리나라의 전통伝統 놀이가 아니다. 일본日本의 하나후다에서 시작했으며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화투패는 총 48장으로 열두 달마다 4장씩 짝이 있고, 각각에는 일본日本상징象徴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일본日本 화투는 뒷면이 검은색이며 한국韓國으로 넘어오면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사진写真은 우리나라 기본基本 화투패를 모아 다중노출多重露出촬영撮影했다. /이선화·이덕인 기자記者

창지創地개명改名 화투 장례葬礼 언어言語생활生活 곳곳 일제日帝 흔적痕跡...민족民族 정통성正統性 바로 세워야

[더팩트fact|이선화·이덕인 기자記者] "광박에 쓰리고, 앗싸 고도리~"

명절이면 집집마다 울려 퍼지던 이 소리가 무척 정겨울 때가 있었다. 담요를 깔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아버지가 패를 맞추면 아들이 동전을 모으던 익숙한 풍경風景, 바로 별다른 놀이문화文化가 없던 시기에 즐겼던 화투 놀이다.

달마다 4장씩 총 48장의 그림패가 있고 각각 짝을 맞춰 점수点数를 따내는 화투는 우리나라 놀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登場할 정도로 대중적大衆的이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찾았다. 민속民俗놀이로 여겨질 정도로 생활生活 깊숙이 자리 잡은 화투, 과연 그 유래由来는 언제부터일까?

화투의 본래本来 이름은 하나후다(花札)로 일본日本전통伝統 놀이다. 일본日本에서 도박賭博행위行為로 만들어진 것이 일제日帝 강점기強占期기점起点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화투에는 일본日本상징象徴하는 다양多様한 그림들이 있는데 일본인日本人들이 좋아하는 벚꽃이 3월, 천황가天皇家상징象徴하는 국화國花가 9월 등이 그 이다.

화투처럼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시절時節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활生活 깊숙이 자리 잡은 일제日帝잔재残滓의외意外로 많다. 민족民族말살抹殺목적目的으로 실시実施한 '창씨創氏개명改名'과 비슷하게 우리 땅 이름을 멋대로 바꾼 이른바 '창지創地개명改名', 해방 후解放 後 일본인日本人들이 남겨놓고 간 집을 뜻하는 '적산가옥敵産家屋', 장례葬礼문화文化, 일본식日本式 단어単語 등 우리의 일상日常 곳곳에 일제日帝흔적痕跡들이 남아있다.

일본日本경제経済보복報復으로 그 어느때보다 뜻깊은 74주년周年 '광복절'을 맞아 여전히 남아있는 생활生活 곳곳의 일제日帝 잔재残滓추적追跡, 친일親日 문화文化청산清算하고 민족民族정통성正統性을 바로 세우는 계기契機로 삼고자 한다 .

송도松島, 명동明洞, 원남동苑南洞...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

인천仁川강남江南으로 불리는 송도松島(松島). 한자漢字를 풀어보면 '소나무 섬'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사진写真으로 보는 송도松島는 이름과 모습이 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천仁川 앞바다가 출렁이는 해안海岸가에 소나무숲조차 없는 이곳이 무슨 이유理由송도松島가 되었을까? 그 유래由来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시대時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일 <ruby>송도<rt>松島</rt></ruby><ruby>국제<rt>國際</rt></ruby><ruby>도시<rt>都市</rt></ruby>의 모습. <ruby>일제<rt>日帝</rt></ruby><ruby>강점기<rt>強占期</rt></ruby> <ruby>송도<rt>松島</rt></ruby>는 <ruby>인천<rt>仁川</rt></ruby><ruby>도호부<rt>都護府</rt></ruby> <ruby>먼우금면<rt>遠又邇面</rt></ruby>에 <ruby>속<rt>属</rt></ruby>했던 곳으로 <ruby>해방 후<rt>解放 後</rt></ruby> <ruby>옥련동<rt>玉連洞</rt></ruby>으로 이름을 바꿨다. <ruby>사진<rt>写真</rt></ruby> 속 <ruby>송도<rt>松島</rt></ruby>는 <ruby>인천<rt>仁川</rt></ruby> 앞바다를 <ruby>매립<rt>埋立</rt></ruby>해 <ruby>육지<rt>陸地</rt></ruby>로 만든 간척지로 <ruby>인천<rt>仁川</rt></ruby>시에서 다시 <ruby>송도<rt>松島</rt></ruby>라는 이름을 붙였다. <ruby>송도<rt>松島</rt></ruby>는 <ruby>일본<rt>日本</rt></ruby> <ruby>군함<rt>軍艦</rt></ruby>의 이름이다.
13일 송도松島국제國際도시都市의 모습.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송도松島인천仁川도호부都護府 먼우금면遠又邇面했던 곳으로 해방 후解放 後 옥련동玉連洞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진写真송도松島인천仁川 앞바다를 매립埋立육지陸地로 만든 간척지로 인천仁川시에서 다시 송도松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송도松島일본日本 군함軍艦의 이름이다.

송도松島조선朝鮮 시대時代 인천仁川도호부都護府 먼우금면遠又邇面했던 곳으로 1914년 부천군富川郡 문학면文鶴面 옥련리玉連里가 됐다가 1936년 인천부仁川部편입編入되면서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송도松島가 되었다. 송도松島일제日帝침략侵略 도구道具였던 일본日本 군함軍艦 마츠시마(松島·마쓰시마)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해방 후解放 後 송도松島옥련동玉連洞으로 바꿨지만, 2000년대年代 인천仁川 앞바다를 매립埋立육지陸地로 만들면서 해당 지역地域(옥련동玉連洞 옆)에 다시 송도松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日本 군함軍艦 국제國際 도시都市. 그것이 지금의 송도松島국제國際도시都市다.

송도松島 외에도 남아있는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의외意外로 많다. 외국인外國人들이 많이 찾는 명동明洞일본日本메이지明治 일왕日王을 기리는 이름 (明)에 을 붙여 만들었다. 인사동仁寺洞일대一帯 여러 고을을 합친 관인방寬仁坊대사동大寺洞임의任意로 따서 지었으며 익선동益善洞돈령동敦寧洞궁동弓洞, 익동益洞, 이동二洞, 한동漢洞 등의 일부一部통합統合했고, 원남동苑南洞·원서동苑西洞은 우리나라 고궁故宮격하格下 시켜 부른 창경원昌慶苑의 남쪽·서쪽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제日帝는 1914년 창지創地개명改名을 통해 국내國内 고유固有 지명地名들을 강제強制일본식日本式으로 바꿔놓았다. 고유固有 지명地名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은 서울에서만 30%가 넘는다.

소나무 송(松)과 섬 도(島)를 합친 <ruby>송도<rt>松島</rt></ruby>. 이름과는 다르게 <ruby>실제<rt>実際</rt></ruby> <ruby>송도<rt>松島</rt></ruby>는 섬도 아니며 소나무 숲도 없다.
소나무 송(松)과 섬 도(島)를 합친 송도松島.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実際 송도松島는 섬도 아니며 소나무 숲도 없다.

1914년 <ruby>창지<rt>創地</rt></ruby><ruby>개명<rt>改名</rt></ruby>을 거치며 우리나라 <ruby>지명<rt>地名</rt></ruby>들은 <ruby>고유<rt>固有</rt></ruby>의 이름을 잃었다. <ruby>해방 후<rt>解放 後</rt></ruby>에도 <ruby>본래<rt>本来</rt></ruby>의 이름을 찾지 못한 <ruby>일본식<rt>日本式</rt></ruby> <ruby>지명<rt>地名</rt></ruby>이 서울에만 30%가 넘는다. <ruby>사진<rt>写真</rt></ruby>은 <ruby>인사동<rt>仁寺洞</rt></ruby>, <ruby>명동<rt>明洞</rt></ruby>, <ruby>익선동<rt>益善洞</rt></ruby>, <ruby>원남동<rt>苑南洞</rt></ruby>을 가리키는 <ruby>표지판<rt>表示板</rt></ruby>과 <ruby>간판<rt>看板</rt></ruby>의 모습(왼쪽 위부터 <ruby>시계<rt>時計</rt></ruby><ruby>방향<rt>方向</rt></ruby>)
1914년 창지創地개명改名을 거치며 우리나라 지명地名들은 고유固有의 이름을 잃었다. 해방 후解放 後에도 본래本来의 이름을 찾지 못한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이 서울에만 30%가 넘는다. 사진写真인사동仁寺洞, 명동明洞, 익선동益善洞, 원남동苑南洞을 가리키는 표지판表示板간판看板의 모습(왼쪽 위부터 시계時計방향方向)

12일 <ruby>오후<rt>午後</rt></ruby> 서울 <ruby>종로구<rt>鍾路区</rt></ruby> <ruby>익선동<rt>益善洞</rt></ruby>을 찾은 <ruby>시민<rt>市民</rt></ruby>들이 <ruby>거리<rt>距離</rt></ruby>를 거닐고 있다.
12일 오후午後 서울 종로구鍾路区 익선동益善洞을 찾은 시민市民들이 거리距離를 거닐고 있다.

◆ 'ㅇㅇ ㅇㅇ번지番地'. 지번地番 주소住所

지금은 구주소旧住所라고 불리는 지번地番 주소住所 역시 1910년대年代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에 따라 일제日帝가 만들었다.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전국全國 토지土地번호番号부여付与했고 소유자所有者조사調査 국토國土의 40%를 강제強制수탈収奪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번地番 주소住所다.

지번地番 주소住所사용使用하는 나라는 세계世界에서 우리나라와 일본日本뿐이다. 게다가 일본日本은 우리보다 일찍 주소住所체계體系개편改編 이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도로명道路名 주소住所 체계體系시행施行하고 있지만 불편不便하다는 이유理由로 아직 혼용混用되고 있다.

ㅇㅇ동 ㅇㅇ<ruby>번지<rt>番地</rt></ruby> <ruby>도로명<rt>道路名</rt></ruby> <ruby>주소<rt>住所</rt></ruby> <ruby>체계<rt>體系</rt></ruby>가 <ruby>시행<rt>施行</rt></ruby>되고 있지만 <ruby>지번<rt>地番</rt></ruby><ruby>주소<rt>住所</rt></ruby>의 <ruby>흔적<rt>痕跡</rt></ruby>이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ㅇㅇ ㅇㅇ번지番地' 도로명道路名 주소住所 체계體系시행施行되고 있지만 지번地番주소住所흔적痕跡이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ruby>지번<rt>地番</rt></ruby> <ruby>주소<rt>住所</rt></ruby>는 <ruby>토지조사사업<rt>土地調査事業</rt></ruby>을 <ruby>시행<rt>施行</rt></ruby>한 <ruby>조선총독부<rt>朝鮮総督府</rt></ruby>가 <ruby>토지<rt>土地</rt></ruby>에 <ruby>번호<rt>番号</rt></ruby>를 <ruby>부여<rt>付与</rt></ruby>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사업을 통해 <ruby>일제<rt>日帝</rt></ruby>는 우리나라 <ruby>국토<rt>國土</rt></ruby>의 40%를 <ruby>강제<rt>強制</rt></ruby>로 <ruby>몰수<rt>没収</rt></ruby>했다. 7일 <ruby>오후<rt>午後</rt></ruby> 서울 중구를 찾은 <ruby>시민<rt>市民</rt></ruby>들이 <ruby>구주소<rt>旧住所</rt></ruby> <ruby>표지판<rt>表示板</rt></ruby>이 남아있는 <ruby>무교동<rt>武橋洞</rt></ruby> <ruby>거리<rt>距離</rt></ruby>를 걷고 있다.
지번地番 주소住所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시행施行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토지土地번호番号부여付与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사업事業을 통해 일제日帝는 우리나라 국토國土의 40%를 강제強制몰수没収했다. 7일 오후午後 서울 중구를 찾은 시민市民들이 구주소旧住所 표지판表示板이 남아있는 무교동武橋洞 거리距離를 걷고 있다.

◆ '유치원幼稚園? 유아원幼児園?'

교육教育 현장現場에 남아있는 일제日帝잔재残滓는 생각보다 많다. 태극기太極旗자에 걸어두는 관례慣例조회朝会, 교복制服이나 두발頭髪 단속, 수학여행修學旅行 등은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일본식日本式 문화文化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치원幼稚園일제日帝잔재残滓 중 하나다. 유치원幼稚園부산釜山체류滞留하고 있던 일본인日本人유아기幼児期 자녀들을 교육教育하기 위한 기관機関으로 시작했으며 독일어独逸語인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일본식日本式으로 번역翻譯하면서 생긴 용어用語다. 또한, 유치원幼稚園에는 수준水準이 낮거나 미숙未熟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중국中國해방解放 직후直後 '유아원幼児園'으로 명칭名称을 바꿨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사용使用 이다.

흔히 <ruby>사용<rt>使用</rt></ruby>하는 <ruby>유치원<rt>幼稚園</rt></ruby>은 <ruby>수준<rt>水準</rt></ruby>이 낮거나 <ruby>미숙<rt>未熟</rt></ruby>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ruby>일제<rt>日帝</rt></ruby>의 <ruby>잔재<rt>残滓</rt></ruby>다.
흔히 사용使用하는 '유치원幼稚園'은 수준水準이 낮거나 미숙未熟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일제日帝잔재残滓다.

<ruby>중국<rt>中國</rt></ruby>은 <ruby>해방<rt>解放</rt></ruby> <ruby>직후<rt>直後</rt></ruby> <ruby>유아원<rt>幼児園</rt></ruby>으로 <ruby>명칭<rt>名称</rt></ruby>을 바꿨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ruby>유치원<rt>幼稚園</rt></ruby>을 <ruby>사용<rt>使用</rt></ruby>하고 있다. 이제는 <ruby>유치원<rt>幼稚園</rt></ruby> <ruby>대신<rt>代身</rt></ruby> <ruby>유아원<rt>幼児園</rt></ruby>·<ruby>유아<rt>幼児</rt></ruby> <ruby>학교<rt>學校</rt></ruby>를 <ruby>사용<rt>使用</rt></ruby>해야 하지 않을까?
중국中國해방解放 직후直後 유아원幼児園으로 명칭名称을 바꿨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유치원幼稚園사용使用하고 있다. 이제는 유치원幼稚園 대신代身 유아원幼児園·유아幼児 학교學校사용使用해야 하지 않을까?

◆ '적산가옥敵産家屋과 머릿돌'

쉬이 볼 수 있는 일제日帝잔재残滓 에는 적산가옥敵産家屋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역사駅舎, 서울도서관図書館, 한국韓國은행銀行부터 상암동上岩洞 근린공원近隣公園복원復元일본군日本軍 관사官舎, 인천仁川 개항장開港場 거리에 있는 일본日本은행銀行 인천仁川지점支店, 일본인日本人들의 거주居住했던 후암동厚岩洞 일대一帯 적산가옥敵産家屋, 강제強制 노역労役동원動員됐던 노동자労働者들의 주택住宅영단営団주택住宅다양多様하다. 이 건물建物들은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시대時代 우리의 아픈 역사歴史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보존保存가치価値가 높은 것으로 평가評価된다.

하지만 머릿돌(정초석礎石)은 다르다. 위 건물建物일부一部에는 조선朝鮮 총독総督휘호揮毫가 새겨진 머릿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건널목 앞에 있는 한국韓國은행銀行 머릿돌에는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처단処断조선朝鮮 통감부統監府 초대初代 통감統監 이토伊藤 히로부미博文휘호揮毫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市立美術館 입구入口 오른쪽 머릿돌에도 사이토斎藤 총독総督의 글씨가 새겨있으며 마포麻浦의 한 아파트アパート 진입로進入路 끝자락에는 조선朝鮮 총독総督을 지낸 우가키宇垣 가즈시게一成의 글씨가 원형原型 그대로 복제複製돼 있다.

서울역사駅舎에는 사이토斎藤 마코토 총독総督의 글씨가 새겨진 머릿돌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서울에서 마코토 총독総督척살刺殺하고자 했던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 동상銅像과 불과 100미터meter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머릿돌에 새겨진 총독総督휘호揮毫. 그것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되새겨야 할까? 유동인구流動人口가 많은 지역地域 곳곳에 숨어있는 아픈 역사歴史흔적痕跡이다.

<ruby>구<rt>旧</rt></ruby> 서울<ruby>역사<rt>駅舎</rt></ruby>는 <ruby>일제<rt>日帝</rt></ruby> <ruby>강점기<rt>強占期</rt></ruby> <ruby>당시<rt>当時</rt></ruby> <ruby>물자<rt>物資</rt></ruby>와 <ruby>인력<rt>人力</rt></ruby><ruby>수급<rt>需給</rt></ruby> 등 <ruby>전쟁<rt>戦争</rt></ruby> <ruby>물자<rt>物資</rt></ruby> <ruby>공급<rt>供給</rt></ruby>을 위한 <ruby>기본<rt>基本</rt></ruby> <ruby>운송수단<rt>運送手段</rt></ruby>으로 <ruby>일본<rt>日本</rt></ruby>이 지은 <ruby>건물<rt>建物</rt></ruby>이다. <ruby>일본인<rt>日本人</rt></ruby>이 <ruby>설계<rt>設計</rt></ruby>한 <ruby>일제<rt>日帝</rt></ruby>의 <ruby>잔재<rt>残滓</rt></ruby>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ruby>철도<rt>鉄道</rt></ruby> <ruby>건물<rt>建物</rt></ruby>이자 <ruby>르네상스<rt>Renaissance</rt></ruby> <ruby>궁전건축<rt>宮殿建築</rt></ruby> <ruby>기법<rt>技法</rt></ruby>의 <ruby>사용<rt>使用</rt></ruby> 등 <ruby>건축사적<rt>建築史的</rt></ruby> <ruby>가치<rt>価値</rt></ruby>가 크다.
서울역사駅舎일제日帝 강점기強占期 당시当時 물자物資인력人力수급需給전쟁戦争 물자物資 공급供給을 위한 기본基本 운송수단運送手段으로 일본日本이 지은 건물建物이다. 일본인日本人설계設計일제日帝잔재残滓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철도鉄道 건물建物이자 르네상스Renaissance 궁전건축宮殿建築 기법技法사용使用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価値가 크다.

<ruby>사진<rt>写真</rt></ruby>은 위에서부터 <ruby>구<rt>旧</rt></ruby> 서울<ruby>특별시<rt>特別市</rt></ruby> <ruby>청사<rt>庁舎</rt></ruby>, 서울 <ruby>한국<rt>韓國</rt></ruby><ruby>은행<rt>銀行</rt></ruby> <ruby>본관<rt>本館</rt></ruby>, <ruby>구<rt>旧</rt></ruby> <ruby>인천<rt>仁川</rt></ruby><ruby>일본<rt>日本</rt></ruby>제1<ruby>은행<rt>銀行</rt></ruby><ruby>지점<rt>支店</rt></ruby>이다. 세 <ruby>건물<rt>建物</rt></ruby> 모두 <ruby>르네상스<rt>Renaissance</rt></ruby> <ruby>양식<rt>様式</rt></ruby>의 <ruby>건축물<rt>建築物</rt></ruby>이며 <ruby>당시<rt>当時</rt></ruby> <ruby>건축기술<rt>建築技術</rt></ruby>을 엿볼 수 있는 <ruby>중요<rt>重要</rt></ruby>한 <ruby>역사적<rt>歴史的</rt></ruby> <ruby>자료<rt>資料</rt></ruby>이자 아픈 <ruby>역사<rt>歴史</rt></ruby>의 <ruby>상징<rt>象徴</rt></ruby>이다.
사진写真은 위에서부터 서울특별시特別市 청사庁舎, 서울 한국韓國은행銀行 본관本館, 인천仁川일본日本1은행銀行지점支店이다. 세 건물建物 모두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様式건축물建築物이며 당시当時 건축기술建築技術을 엿볼 수 있는 중요重要역사적歴史的 자료資料이자 아픈 역사歴史상징象徴이다.

<ruby>상암동<rt>上岩洞</rt></ruby> 부엉이 <ruby>근린공원<rt>近隣公園</rt></ruby>에 <ruby>이축<rt>移築</rt></ruby> <ruby>복원<rt>復元</rt></ruby>된 <ruby>일본군<rt>日本軍</rt></ruby> <ruby>관사<rt>官舎</rt></ruby>. 이 <ruby>건물<rt>建物</rt></ruby>은 1937<ruby>년경<rt>年頃</rt></ruby> <ruby>일본<rt>日本</rt></ruby> <ruby>주둔군<rt>駐屯軍</rt></ruby> <ruby>관사<rt>官舎</rt></ruby>로 <ruby>건립<rt>建立</rt></ruby>되어 <ruby>약<rt>約</rt></ruby> 8<ruby>년간<rt>年間</rt></ruby> <ruby>사용<rt>使用</rt></ruby> <ruby>후<rt>後</rt></ruby> <ruby>적산가옥<rt>敵産家屋</rt></ruby>이 됐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ruby>약<rt>約</rt></ruby> 11<ruby>년간<rt>年間</rt></ruby> <ruby>국군<rt>國軍</rt></ruby>의 <ruby>관사<rt>官舎</rt></ruby>로 <ruby>사용<rt>使用</rt></ruby>된 것으로 <ruby>추정<rt>推定</rt></ruby>되며 <ruby>이후<rt>以後</rt></ruby> <ruby>개인<rt>個人</rt></ruby>에게 <ruby>매각<rt>売却</rt></ruby>됐다.
상암동上岩洞 부엉이 근린공원近隣公園이축移築 복원復元일본군日本軍 관사官舎. 이 건물建物은 1937년경年頃 일본日本 주둔군駐屯軍 관사官舎건립建立되어 8년간年間 사용使用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됐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간年間 국군國軍관사官舎사용使用된 것으로 추정推定되며 이후以後 개인個人에게 매각売却됐다.

<ruby>국내<rt>國内</rt></ruby> <ruby>유일<rt>唯一</rt></ruby>의 <ruby>일본군<rt>日本軍</rt></ruby> <ruby>관사<rt>官舎</rt></ruby>. <ruby>근대기<rt>近代期</rt></ruby> <ruby>주거<rt>住居</rt></ruby> 또는 <ruby>군인<rt>軍人</rt></ruby> <ruby>관사<rt>官舎</rt></ruby>에 <ruby>관<rt>関</rt></ruby>한 <ruby>연구<rt>研究</rt></ruby> <ruby>대상<rt>対象</rt></ruby>으로 지금까지 <ruby>보존<rt>保存</rt></ruby>돼 있다.
국내國内 유일唯一일본군日本軍 관사官舎. 근대기近代期 주거住居 또는 군인軍人 관사官舎연구研究 대상対象으로 지금까지 보존保存돼 있다.

<ruby>인천<rt>仁川</rt></ruby> <ruby>산곡동<rt>山谷洞</rt></ruby> <ruby>영단<rt>営団</rt></ruby><ruby>주택<rt>住宅</rt></ruby>의 모습. <ruby>영단<rt>営団</rt></ruby><ruby>주택<rt>住宅</rt></ruby>은 <ruby>전시<rt>戦時</rt></ruby> <ruby>체제하<rt>體制下</rt></ruby>에서 <ruby>일제<rt>日帝</rt></ruby>가 <ruby>조선<rt>朝鮮</rt></ruby>의 <ruby>병참<rt>兵站</rt></ruby> <ruby>기지화<rt>基地化</rt></ruby>를 위해 <ruby>건설<rt>建設</rt></ruby>한 <ruby>군수<rt>軍需</rt></ruby> <ruby>산업체<rt>産業體</rt></ruby>에 <ruby>근무<rt>勤務</rt></ruby>하는 <ruby>노동자<rt>労働者</rt></ruby>의 <ruby>주택<rt>住宅</rt></ruby> <ruby>부족<rt>不足</rt></ruby> <ruby>문제<rt>問題</rt></ruby>를 <ruby>해결<rt>解決</rt></ruby>하기 위해 <ruby>공급<rt>供給</rt></ruby>된 <ruby>주택<rt>住宅</rt></ruby>이다. <ruby>산곡동<rt>山谷洞</rt></ruby> 외에도 서울 <ruby>문래동<rt>文来洞</rt></ruby>, <ruby>대방동<rt>大方洞</rt></ruby>, <ruby>상도동<rt>上道洞</rt></ruby>, <ruby>인천<rt>仁川</rt></ruby> <ruby>숭의동<rt>崇義洞</rt></ruby>에 각각 <ruby>건설<rt>建設</rt></ruby>됐다.
인천仁川 산곡동山谷洞 영단営団주택住宅의 모습. 영단営団주택住宅전시戦時 체제하體制下에서 일제日帝조선朝鮮병참兵站 기지화基地化를 위해 건설建設군수軍需 산업체産業體근무勤務하는 노동자労働者주택住宅 부족不足 문제問題해결解決하기 위해 공급供給주택住宅이다. 산곡동山谷洞 외에도 서울 문래동文来洞, 대방동大方洞, 상도동上道洞, 인천仁川 숭의동崇義洞에 각각 건설建設됐다.

서울 <ruby>후암동<rt>厚岩洞</rt></ruby>에는 남아있는 <ruby>적산가옥<rt>敵産家屋</rt></ruby>이 많이 있다. 뾰족한 지붕과 2<ruby>층식<rt>層式</rt></ruby> <ruby>건물<rt>建物</rt></ruby> <ruby>구조<rt>構造</rt></ruby>가 <ruby>일제<rt>日帝</rt></ruby><ruby>강점기<rt>強占期</rt></ruby> <ruby>일본식<rt>日本式</rt></ruby> <ruby>주택<rt>住宅</rt></ruby>의 <ruby>특징<rt>特徴</rt></ruby>이다.
서울 후암동厚岩洞에는 남아있는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많이 있다. 뾰족한 지붕과 2층식層式 건물建物 구조構造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일본식日本式 주택住宅특징特徴이다.

<ruby>건축사적<rt>建築史的</rt></ruby> <ruby>가치<rt>価値</rt></ruby>가 있는 <ruby>적산가옥<rt>敵産家屋</rt></ruby>과 다르게 <ruby>총독<rt>総督</rt></ruby> <ruby>휘호<rt>揮毫</rt></ruby>가 새겨진 머릿돌은 <ruby>역사<rt>歴史</rt></ruby>의 아픔을 지닌 <ruby>일제<rt>日帝</rt></ruby>의 <ruby>잔재<rt>残滓</rt></ruby>이다. <ruby>대<ruby>부분<rt>部分</rt></ruby><rt>大部分</rt></ruby> 사람들은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머릿돌을 보고도 <ruby>의미<rt>意味</rt></ruby>를 모르고 지나친다. <ruby>사진<rt>写真</rt></ruby>은 <ruby>구<rt>旧</rt></ruby> 서울<ruby>역사<rt>駅舎</rt></ruby> 머릿돌, 서울<ruby>시립미술관<rt>市立美術館</rt></ruby> 머릿돌, <ruby>마포구<rt>麻浦区</rt></ruby> <ruby>선통물<rt>善通物</rt></ruby> <ruby>표시석<rt>表示石</rt></ruby>, <ruby>한국<rt>韓國</rt></ruby><ruby>은행<rt>銀行</rt></ruby> <ruby>본관<rt>本館</rt></ruby> 머릿돌(왼쪽 위부터 <ruby>시계<rt>時計</rt></ruby><ruby>방향<rt>方向</rt></ruby>)의 모습이다.
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価値가 있는 적산가옥敵産家屋과 다르게 총독総督 휘호揮毫가 새겨진 머릿돌은 역사歴史의 아픔을 지닌 일제日帝잔재残滓이다. 부분部分大部分 사람들은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머릿돌을 보고도 의미意味를 모르고 지나친다. 사진写真 서울역사駅舎 머릿돌, 서울시립미술관市立美術館 머릿돌, 마포구麻浦区 선통물善通物 표시석表示石, 한국韓國은행銀行 본관本館 머릿돌(왼쪽 위부터 시계時計방향方向)의 모습이다.

일제日帝가 이름 붙인 '창경궁昌慶宮 춘당지春塘池'

조선朝鮮의 세 번째 궁궐宮廷창경궁昌慶宮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수난受難을 온몸으로 겪은 역사歴史흔적痕跡이다.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 시절時節 일본日本이 우리나라 고궁故宮격하格下시키기 위해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동물원動物園, 식물원植物園, 온갖 놀이시설施設들을 조성造成했다. 또한 수 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고 케이블카cable car설치設置하면서 60여 채의 전각篆刻과 담장, 궁 문들이 철거撤去되거나 변형変形됐다. 1984년부터 궁궐宮廷 복원사업復元事業진행進行됐지만 완벽完璧하게 복구復旧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춘당지春塘池다.

지금의 춘당지春塘池는 두 부분部分으로 나뉘어있는데 작은 연못이 원래元来춘당지春塘池(백연담白蓮潭)다. 아래쪽 큰 연못(내농포內農圃)은 국왕國王궁궐宮廷 안에서 직접直接 농사農事짓는 의식儀式을 행했던 곳으로 본래本来는 연못이 아닌 논이었다. 춘당지春塘池명칭名称춘당대春塘臺 옆에 있는 못이라는 뜻으로 일제日帝가 붙인 이름이다. 사실상事実上 연못을 복원復元할 수가 없어 그대로 남겨져 있는 일제日帝잔재残滓 중 하나이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ruby>원래<rt>元来</rt></ruby>의 <ruby>춘당지<rt>春塘池</rt></ruby>인 <ruby>백연담<rt>白蓮潭</rt></ruby>(왼쪽), <ruby>원래<rt>元来</rt></ruby>는 논이었던 <ruby>내농포<rt>內農圃</rt></ruby>(오른쪽)의 모습이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원래元来춘당지春塘池백연담白蓮潭(왼쪽), 원래元来는 논이었던 내농포內農圃(오른쪽)의 모습이다.

<ruby>춘당지<rt>春塘池</rt></ruby>와 소<ruby>춘당지<rt>春塘池</rt></ruby>(<ruby>백연담<rt>白蓮潭</rt></ruby>) 사이에 있는 <ruby>팔각칠층석탑<rt>八角七層石塔</rt></ruby>. <ruby>중국식<rt>中國式</rt></ruby> <ruby>석탑<rt>石塔</rt></ruby>으로서, <ruby>기존<rt>既存</rt></ruby>의 <ruby>석탑<rt>石塔</rt></ruby>과는 <ruby>양식<rt>様式</rt></ruby>을 달리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ruby>연유<rt>縁由</rt></ruby>로 이곳에 옮겨 세웠는지 <ruby>정확<rt>正確</rt></ruby>한 <ruby>내용<rt>内容</rt></ruby>은 나와 있지 않다.
춘당지春塘池소춘당지小春塘池(백연담白蓮潭) 사이에 있는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 중국식中國式 석탑石塔으로서, 기존既存석탑石塔과는 양식様式을 달리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연유縁由로 이곳에 옮겨 세웠는지 정확正確내용内容은 나와 있지 않다.

<ruby>춘당지<rt>春塘池</rt></ruby>에 있던 나룻배의 모습. <ruby>일본<rt>日本</rt></ruby>은 <ruby>창경궁<rt>昌慶宮</rt></ruby>을 <ruby>창경원<rt>昌慶苑</rt></ruby>으로 <ruby>격하<rt>格下</rt></ruby>시키고 온갖 놀이<ruby>시설<rt>施設</rt></ruby>을 <ruby>조성<rt>造成</rt></ruby>했다. <ruby>케이블카<rt>cable car</rt></ruby>, 뱃놀이 등은 <ruby>당시<rt>当時</rt></ruby> 놀이<ruby>시설<rt>施設</rt></ruby>의 <ruby>일부<rt>一部</rt></ruby>다.
춘당지春塘池에 있던 나룻배의 모습. 일본日本창경궁昌慶宮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格下시키고 온갖 놀이시설施設조성造成했다. 케이블카cable car, 뱃놀이 등은 당시当時 놀이시설施設일부一部다.

<ruby>춘당지<rt>春塘池</rt></ruby>란 <ruby>명칭<rt>名称</rt></ruby>은 <ruby>춘당대<rt>春塘臺</rt></ruby> 옆에 있는 못이라는 뜻으로 <ruby>일제<rt>日帝</rt></ruby>가 붙인 이름이다.
춘당지春塘池명칭名称춘당대春塘臺 옆에 있는 못이라는 뜻으로 일제日帝가 붙인 이름이다.

◆ '일상日常에 녹아있는 일제日帝흔적痕跡'

겨울철 대표代表 음식 붕어빵도 그 시작은 일본日本의 풀빵인 다이야끼たい焼き다. 다이たい는 우리나라의 도미를 뜻하며 도미 모양의 틀에 밀가루 반죽과 팥 앙금을 넣어 만드는 방식方式이 그대로 한국韓國으로 건너와 붕어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팥앙금 이외에 슈크림이나 고구마 앙금을 넣어 다양多様하게 바뀌고 있지만, 제조과정製造過程은 큰 차이差異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일상日常에 녹아있는 일제日帝잔재残滓는 많이 있다. 고된 일을 일컫는 일본어日本語인 노가다, 물방울 모양을 일컫는 일본日本 단어単語덴덴点々을 우리식으로 발음発音한 땡땡이, 선임先任을 뜻하는 일본어日本語를 우리식으로 표현表現고참古参, 1930년대年代부터 사용使用일제日帝 강점기強占期 단어単語 잔업残業, 서열序列조장助長하며 일제日帝편의便宜를 위해 지은 제일第一·중앙中央 등의 명칭名称, 일본식日本式 선술집 이자카야居酒屋, 기본基本 안주를 일컫는 스끼다시, 그룹group일본식日本式으로 발음発音구락부クラブ, 모호하다의 일본식日本式 표현表現애매曖昧, 빵집 이름으로 흔히 사용使用되는 '~'. 전부全部 일본日本흔적痕跡이다.

우리나라의 붕어빵은 <ruby>일본<rt>日本</rt></ruby>의 <ruby>다이야끼<rt>たい焼き</rt></ruby>에서 넘어왔다. <ruby>일본<rt>日本</rt></ruby>에서는 도미 모양의 틀에 밀가루 반죽과 팥 앙금을 넣고 만든 빵을 타이야끼(도미빵)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선 도미 모양이 아닌 붕어 모양의 틀을 <ruby>사용<rt>使用</rt></ruby>한다.
우리나라의 붕어빵은 일본日本다이야끼たい焼き에서 넘어왔다. 일본日本에서는 도미 모양의 틀에 밀가루 반죽과 팥 앙금을 넣고 만든 빵을 다이야끼たい焼き(도미빵)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선 도미 모양이 아닌 붕어 모양의 틀을 사용使用한다.

<ruby>일본식<rt>日本式</rt></ruby> <ruby>언어<rt>言語</rt></ruby>는 우리의 <ruby>일상<rt>日常</rt></ruby> 깊숙이 <ruby>침투<rt>浸透</rt></ruby>해있다. <ruby>사진<rt>写真</rt></ruby> 속에 있는 스끼다시, <ruby>이자카야<rt>居酒屋</rt></ruby>, <ruby>구락부<rt>クラブ</rt></ruby>, <ruby>제일<rt>第一</rt></ruby> 외에도 노가다, 땡땡이, <ruby>고참<rt>古参</rt></ruby>, <ruby>잔업<rt>残業</rt></ruby>, <ruby>시말서<rt>始末書</rt></ruby>, 다대기, <ruby>파이팅<rt>fighting</rt></ruby>, <ruby>간지<rt>干支</rt></ruby>, <ruby>애매<rt>曖昧</rt></ruby> 등이 있다.
일본식日本式 언어言語는 우리의 일상日常 깊숙이 침투浸透해있다. 사진写真 속에 있는 스끼다시, 이자카야居酒屋, 구락부クラブ, 제일第一 외에도 노가다, 땡땡이, 고참古参, 잔업残業, 시말서始末書, 다대기, 파이팅fighting, 간지干支, 애매曖昧 등이 있다.

빵집 이름으로 흔히 <ruby>사용<rt>使用</rt></ruby>되는 ~<ruby>당<rt>堂</rt></ruby>도 <ruby>일제<rt>日帝</rt></ruby><ruby>강점기<rt>強占期</rt></ruby>가 그 시작이다.
빵집 이름으로 흔히 사용使用되는 '~'도 일제日帝강점기強占期가 그 시작이다.

◆ '간소화簡素化장례葬礼문화文化'

1934년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한 '의례儀礼준칙準則'. 이 안에는 우리나라의 전통伝統 장례葬礼 문화文化무시無視하고 상주喪主상복喪服, 슴렴襲殮, 상기喪期간소화簡素化장례葬礼문화文化제시提示돼 있다. 삼베 수의寿衣, 유족遺族 완장腕章이 그 이다.

본래本来 우리나라 수의寿衣생전生前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사용使用함에 따라 비단緋緞이나 명주明紬 등이 쓰였다. 하지만 일제日帝비단緋緞 수의寿衣사치奢侈스럽다는 이유理由로 삼베 수의寿衣격하格下시켰다. 상복喪服본래本来 입었던 굴건屈巾제복制服이 아니라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착용着用하거나 상장喪章을 달도록 제한制限했고 양복洋服을 입을 경우境遇에는 완장腕章을 차도록 했다.

이 외에도 병풍屏風 대신代身 일본日本 왕실王室상징象徴하는 국화國花장식装飾, 공동묘지共同墓地 등은 전부全部 일제日帝잔재残滓이다.

<ruby>조선총독부<rt>朝鮮総督府</rt></ruby>가 <ruby>정<rt>定</rt></ruby>한 <ruby>의례<rt>儀礼</rt></ruby><ruby>준칙<rt>準則</rt></ruby>에 따르면 <ruby>상복<rt>喪服</rt></ruby>은 <ruby>본래<rt>本来</rt></ruby> 입었던 <ruby>굴건<rt>屈巾</rt></ruby><ruby>제복<rt>制服</rt></ruby>이 아니라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ruby>착용<rt>着用</rt></ruby>하거나 <ruby>상장<rt>喪章</rt></ruby>을 달도록 <ruby>제한<rt>制限</rt></ruby>했고, <ruby>양복<rt>洋服</rt></ruby>을 입었을 때는 <ruby>완장<rt>腕章</rt></ruby>을 차도록 했다. <ruby>완장<rt>腕章</rt></ruby>은 우리나라 <ruby>전통<rt>伝統</rt></ruby> <ruby>장례<rt>葬礼</rt></ruby><ruby>문화<rt>文化</rt></ruby>에는 <ruby>존재<rt>存在</rt></ruby>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한 '의례儀礼준칙準則'에 따르면 상복喪服본래本来 입었던 굴건屈巾제복制服이 아니라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착용着用하거나 상장喪章을 달도록 제한制限했고, 양복洋服을 입었을 때는 완장腕章을 차도록 했다. 완장腕章은 우리나라 전통伝統 장례葬礼문화文化에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ruby>병풍<rt>屏風</rt></ruby> <ruby>대신<rt>代身</rt></ruby> <ruby>일본<rt>日本</rt></ruby> <ruby>왕실<rt>王室</rt></ruby>을 <ruby>상징<rt>象徴</rt></ruby>하는 <ruby>국화<rt>國花</rt></ruby>꽃을 <ruby>사용<rt>使用</rt></ruby>하게 한 것도 <ruby>일제<rt>日帝</rt></ruby>의 <ruby>잔재<rt>残滓</rt></ruby>이다.
병풍屏風 대신代身 일본日本 왕실王室상징象徴하는 국화國花꽃을 사용使用하게 한 것도 일제日帝잔재残滓이다.

◆ '주머니 속' 친일親日흔적痕跡

일제日帝잔재残滓친일파親日派흔적痕跡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화梨花여대女大 설립자創立者김활란金活蘭은 1930년대年代부터 친일親日·반민족反民族 행위行為를 일삼았던 대표적代表的친일親日 인사人士다.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주관主管하는 여러 친일親日단체団體참가参加했고 신문新聞잡지雑誌에 글을 남기는 등 다양多様친일親日 활동活動을 했다. 김활란金活蘭이대梨大 캠퍼스campus 한가운데에 동상銅像으로 남아 여전히 그 위풍威風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폐紙幣에도 친일親日흔적痕跡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만 원짜리 속 세종대왕世宗大王 영정影幀을 그린 이는 천재天才 화가画家로 알려진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画伯이다. 오만 원권 속의 신사임당申師任堂 영정影幀 역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画伯작품作品이다. 두 사람은 친일親日 혐의嫌疑농후濃厚작품作品들을 여럿 발표発表하며 대한민국大韓民國 미술계美術界원로元老대접待接받았다.

주머니 속에 늘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지폐紙幣. 청산清算하지 못한 친일親日폐해弊害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象徴이다.

<ruby>이화<rt>梨花</rt></ruby><ruby>여대<rt>女大</rt></ruby> <ruby>캠퍼스<rt>campus</rt></ruby>에는 <ruby>친일파<rt>親日派</rt></ruby>로 알려진 <ruby>김활란<rt>金活蘭</rt></ruby> <ruby>동상<rt>銅像</rt></ruby>이 세워져 있다. <ruby>김활란<rt>金活蘭</rt></ruby>은 <ruby>이화<rt>梨花</rt></ruby><ruby>여대<rt>女大</rt></ruby> <ruby>설립자<rt>創立者</rt></ruby>지만 1930<ruby>년대<rt>年代</rt></ruby> 여러 <ruby>친일<rt>親日</rt></ruby><ruby>단체<rt>団體</rt></ruby>에 <ruby>참가<rt>参加</rt></ruby>하고 <ruby>신문<rt>新聞</rt></ruby>과 <ruby>잡지<rt>雑誌</rt></ruby>에 <ruby>관련<rt>関連</rt></ruby> 글을 남기는 등 <ruby>다양<rt>多様</rt></ruby>한 <ruby>친일<rt>親日</rt></ruby> <ruby>활동<rt>活動</rt></ruby>을 했다. <ruby>이대<rt>梨大</rt></ruby> <ruby>학생<rt>學生</rt></ruby>들은 <ruby>김활란<rt>金活蘭</rt></ruby> <ruby>동상<rt>銅像</rt></ruby> <ruby>철거<rt>撤去</rt></ruby>를 <ruby>요구<rt>要求</rt></ruby>하며 <ruby>동상<rt>銅像</rt></ruby> 앞에 <ruby>친일<rt>親日</rt></ruby> <ruby>행적<rt>行蹟</rt></ruby> 알림 <ruby>팻<rt>牌</rt></ruby>말을 세워둔 바 있다. 해당 <ruby>팻<rt>牌</rt></ruby>말은 <ruby>현재<rt>現在</rt></ruby> <ruby>학교<rt>學校</rt></ruby> 측에서 <ruby>철거<rt>撤去</rt></ruby>한 <ruby>상태<rt>状態</rt></ruby>다.
이화梨花여대女大 캠퍼스campus에는 친일파親日派로 알려진 김활란金活蘭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다. 김활란金活蘭이화梨花여대女大 설립자創立者지만 1930년대年代 여러 친일親日단체団體참가参加하고 신문新聞잡지雑誌관련関連 글을 남기는 등 다양多様친일親日 활동活動을 했다. 이대梨大 학생學生들은 김활란金活蘭 동상銅像 철거撤去요구要求하며 동상銅像 앞에 친일親日 행적行蹟 알림 말을 세워둔 바 있다. 해당 말은 현재現在 학교學校 측에서 철거撤去상태状態다.

우리나라 <ruby>지폐<rt>紙幣</rt></ruby> 속 <ruby>초상화<rt>肖像画</rt></ruby>는 <ruby>친일<rt>親日</rt></ruby> <ruby>화가<rt>画家</rt></ruby>인 <ruby>운보<rt>雲甫</rt></ruby> <ruby>김기창<rt>金基昶</rt></ruby> <ruby>화백<rt>画伯</rt></ruby>, <ruby>이당<rt>以堂</rt></ruby> <ruby>김은호<rt>金殷鎬</rt></ruby> <ruby>화백<rt>画伯</rt></ruby>의 <ruby>작품<rt>作品</rt></ruby>이다. <ruby>청산<rt>清算</rt></ruby>하지 못한 <ruby>친일<rt>親日</rt></ruby>의 <ruby>폐해<rt>弊害</rt></ruby>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ruby>상징<rt>象徴</rt></ruby>이다.
우리나라 지폐紙幣초상화肖像画친일親日 화가画家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画伯,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画伯작품作品이다. 청산清算하지 못한 친일親日폐해弊害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징象徴이다.

<ruby>송도<rt>松島</rt></ruby> 하늘에 펄럭이는 <ruby>일본<rt>日本</rt></ruby>의 <ruby>국기<rt>國旗</rt></ruby>. <ruby>일제<rt>日帝</rt></ruby>의 <ruby>잔재<rt>残滓</rt></ruby>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많은 것들을 지금이라도 <ruby>청산<rt>清算</rt></ruby>하고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송도松島 하늘에 펄럭이는 일본日本국기國旗. 일제日帝잔재残滓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많은 것들을 지금이라도 청산清算하고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광복 후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일제日帝 잔재残滓 청산清算은 우리의 숙원宿願이다. 일상日常생활生活에 자리 잡아 일제日帝잔재残滓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많은 것들을 지금이라도 청산清算하고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74년 전年 前 이 땅에 울려 퍼졌던 "대한민국大韓民國 만세万歳!"처럼 청산清算하지 않은 일제日帝잔재残滓를 바로잡아 당당堂堂역사歴史를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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